<출처 : 한국건설신문> http://www.conslove.co.kr/news/articleView.html?idxno=88279
기술사 경력요건 완화, 시민의 안전만 후퇴시킬 뿐
권한과 책임이 일치하는 '단일 면허' 체계가 필요

<이석종 비아이티솔루션 대표>
사람은 인간이 만든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학자들은 이를 '인공환경(Built Environment)'이라 부른다. 우리가 매일 걷는 보도와 지나는 교량, 일하는 빌딩과 잠드는 아파트, 마시는 물을 각 가정으로 전달하는 관로와 폭우를 막는 제방까지 — 우리 일상의 거의 모든 무대가 건설로 빚어진 인공 환경이다.
이 환경의 안전은 곧 시민의 생명과 직결된다. 한 채의 건물, 한 개의 교량, 한 구간의 지하구조물이 무너지면 한 사람이 아니라 수십, 수백 명의 안전이 한꺼번에 위협받는다.
의사는 한 사람의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한다. 그러나 건설엔지니어는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그리고 오랜 기간 이용하는 공간과 시설을 설계하고, 감리하며, 시공한다.
그 영향력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런데 정작 우리 사회에는 이 중차대한 일을 '누가 최종적으로 책임지고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확고한 전문가 시스템이 부재하다.
■ 부동산 중개는 자격이 필수, 건설은 자격증 없어도 가능?
부동산의 임대와 매매를 중개하는 일은 공인중개사법에 따라 자격을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다. 한 건의 거래를 매개하는 일에도 국가는 자격을 요구한다.
그런데 수만 명이 이용하는 교량의 구조 설계나, 한 도시의 동맥과도 같은 도로·철도의 시공에 대해서는 "누가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가?"에 대한 법적 정의가 놀라울 정도로 느슨하다.
건설 관련 자격은 존재하지만, 독립적인 권한과 책임을 지는 '면허(License)'가 아니라 산업기사-기사-기술사로 이어지는 등급화된 '자격(Certification)'으로 흩어져 있다.
심지어 기능 계열과 기술 계열의 경계마저 모호해져 자격의 갈래는 더욱 복잡해졌다. 누가 진짜 의사결정권자이고 책임자인지 사회적 합의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시민의 생명을 떠받치는 인프라를 지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 입사 3년차 사원에게 시민의 안전을 맡길 것인가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바로잡기는커녕, 고용노동부는 최근 국가기술자격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기술사 응시 자격 중 실무경력 요건을 기존 4년에서 2년으로 단축, 청년층의 진입 기회를 확대하겠다는 취지다.
기술사는 의료계에 빗대자면 '전문의'에 해당한다. 단순히 시술을 보조하는 사람이 아니라, 공학적 의사결정을 내리고 자신의 서명으로 그 결과에 최종 책임을 지는 자리다. 설계의 안전성을 판정하고, 시공 중 발생한 예측 불가한 변수에 대해 즉각적이고 정확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런데 실무 2년은 우리 사회의 일반적 기준으로는 입사 3년차, 즉 '사원급'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건설 프로젝트는 기획부터 준공까지 짧게는 3~4년, 길게는 10년 이상이 소요된다.
경력 2년이라면 단 하나의 프로젝트도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경험해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제 막 선배 엔지니어의 지시에 따라 단위 업무를 배우는 시기이지, 프로젝트 전반의 안전과 리스크를 통찰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사원급 엔지니어가 단지 시험을 통과했다는 이유만으로 중대한 공학적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진다는 것은 명백한 어불성설이다.
미국과 일본 등 대부분의 선진국이 기술사(PE) 응시 자격으로 엄격한 기초 시험 통과와 함께 최소 4년 이상의 검증된 실무경력을 요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지금 세계적 기준에서 거꾸로 가려고 하는 것이다.
■ 공학적 판단의 결과, 수십 년 뒤에나 나온다
공학적 판단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 오류가 즉각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잘못된 구조적 판단은 수년, 길게는 수십 년이 지난 뒤 단 한 번의 지진이나 집중호우를 만나 대형 참사로 이어진다.
그 시설을 이용하는 모든 시민의 생명을 담보로 말이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한 시공의 결함이 아니라, 설계나 시공 과정에서 내려진 '기술적 판단'의 실패인 경우가 많다.
기술(Engineering)과 기능(Skill)은 엄연히 다르다. 안전한 인프라는 기술적으로 완벽한 설계가 선행되고, 그 설계가 기능적으로 정확히 구현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두 축은 서로 다른 영역의 전문성을 요구하므로, 설계의 깊이와 시공의 숙련도를 같은 잣대로 재거나 혼재해서는 안 된다.
■ 안전은 시간을 줄여서 얻는 게 아니다
세월호, 광주 화정아파트, 분당 정자교 붕괴 - 우리는 이미 너무나도 뼈아픈 비용을 치렀다.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우리 사회는 '전문가의 철저하고 책임 있는 판단'을 부르짖었다. 그런데 정작 그 판단의 최전선에 서야 할 기술사의 자격 요건은 지금 어처구니없이 낮아지려 하고 있다.
인공환경의 안전은 경험의 시간을 단축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충분한 현장 경험, 숱한 실패와 극복을 통한 판단력의 축적, 그리고 책임의 무게를 체화하는 시간. 이것만이 한 사람의 엔지니어를 진정한 기술사로 빚어낸다.
노동부의 이번 시행령 개정안은 즉각 철회돼야 한다. 나아가 이 기회에 기술과 기능을 명확히 분리하고, 흩어진 기술 자격을 권한과 책임이 일치하는 '단일 면허' 체계로 재설계할 것을 강력히 제안한다.
시민의 생명은, 설익은 제도 개혁의 실험 대상이 될 수 없다.
출처 : 한국건설신문(http://www.conslove.co.kr)
<출처 : 한국건설신문> http://www.conslove.co.kr/news/articleView.html?idxno=88279
기술사 경력요건 완화, 시민의 안전만 후퇴시킬 뿐
권한과 책임이 일치하는 '단일 면허' 체계가 필요
<이석종 비아이티솔루션 대표>
사람은 인간이 만든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학자들은 이를 '인공환경(Built Environment)'이라 부른다. 우리가 매일 걷는 보도와 지나는 교량, 일하는 빌딩과 잠드는 아파트, 마시는 물을 각 가정으로 전달하는 관로와 폭우를 막는 제방까지 — 우리 일상의 거의 모든 무대가 건설로 빚어진 인공 환경이다.
이 환경의 안전은 곧 시민의 생명과 직결된다. 한 채의 건물, 한 개의 교량, 한 구간의 지하구조물이 무너지면 한 사람이 아니라 수십, 수백 명의 안전이 한꺼번에 위협받는다.
의사는 한 사람의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한다. 그러나 건설엔지니어는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그리고 오랜 기간 이용하는 공간과 시설을 설계하고, 감리하며, 시공한다.
그 영향력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런데 정작 우리 사회에는 이 중차대한 일을 '누가 최종적으로 책임지고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확고한 전문가 시스템이 부재하다.
■ 부동산 중개는 자격이 필수, 건설은 자격증 없어도 가능?
부동산의 임대와 매매를 중개하는 일은 공인중개사법에 따라 자격을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다. 한 건의 거래를 매개하는 일에도 국가는 자격을 요구한다.
그런데 수만 명이 이용하는 교량의 구조 설계나, 한 도시의 동맥과도 같은 도로·철도의 시공에 대해서는 "누가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가?"에 대한 법적 정의가 놀라울 정도로 느슨하다.
건설 관련 자격은 존재하지만, 독립적인 권한과 책임을 지는 '면허(License)'가 아니라 산업기사-기사-기술사로 이어지는 등급화된 '자격(Certification)'으로 흩어져 있다.
심지어 기능 계열과 기술 계열의 경계마저 모호해져 자격의 갈래는 더욱 복잡해졌다. 누가 진짜 의사결정권자이고 책임자인지 사회적 합의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시민의 생명을 떠받치는 인프라를 지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 입사 3년차 사원에게 시민의 안전을 맡길 것인가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바로잡기는커녕, 고용노동부는 최근 국가기술자격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기술사 응시 자격 중 실무경력 요건을 기존 4년에서 2년으로 단축, 청년층의 진입 기회를 확대하겠다는 취지다.
기술사는 의료계에 빗대자면 '전문의'에 해당한다. 단순히 시술을 보조하는 사람이 아니라, 공학적 의사결정을 내리고 자신의 서명으로 그 결과에 최종 책임을 지는 자리다. 설계의 안전성을 판정하고, 시공 중 발생한 예측 불가한 변수에 대해 즉각적이고 정확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런데 실무 2년은 우리 사회의 일반적 기준으로는 입사 3년차, 즉 '사원급'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건설 프로젝트는 기획부터 준공까지 짧게는 3~4년, 길게는 10년 이상이 소요된다.
경력 2년이라면 단 하나의 프로젝트도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경험해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제 막 선배 엔지니어의 지시에 따라 단위 업무를 배우는 시기이지, 프로젝트 전반의 안전과 리스크를 통찰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사원급 엔지니어가 단지 시험을 통과했다는 이유만으로 중대한 공학적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진다는 것은 명백한 어불성설이다.
미국과 일본 등 대부분의 선진국이 기술사(PE) 응시 자격으로 엄격한 기초 시험 통과와 함께 최소 4년 이상의 검증된 실무경력을 요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지금 세계적 기준에서 거꾸로 가려고 하는 것이다.
■ 공학적 판단의 결과, 수십 년 뒤에나 나온다
공학적 판단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 오류가 즉각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잘못된 구조적 판단은 수년, 길게는 수십 년이 지난 뒤 단 한 번의 지진이나 집중호우를 만나 대형 참사로 이어진다.
그 시설을 이용하는 모든 시민의 생명을 담보로 말이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한 시공의 결함이 아니라, 설계나 시공 과정에서 내려진 '기술적 판단'의 실패인 경우가 많다.
기술(Engineering)과 기능(Skill)은 엄연히 다르다. 안전한 인프라는 기술적으로 완벽한 설계가 선행되고, 그 설계가 기능적으로 정확히 구현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두 축은 서로 다른 영역의 전문성을 요구하므로, 설계의 깊이와 시공의 숙련도를 같은 잣대로 재거나 혼재해서는 안 된다.
■ 안전은 시간을 줄여서 얻는 게 아니다
세월호, 광주 화정아파트, 분당 정자교 붕괴 - 우리는 이미 너무나도 뼈아픈 비용을 치렀다.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우리 사회는 '전문가의 철저하고 책임 있는 판단'을 부르짖었다. 그런데 정작 그 판단의 최전선에 서야 할 기술사의 자격 요건은 지금 어처구니없이 낮아지려 하고 있다.
인공환경의 안전은 경험의 시간을 단축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충분한 현장 경험, 숱한 실패와 극복을 통한 판단력의 축적, 그리고 책임의 무게를 체화하는 시간. 이것만이 한 사람의 엔지니어를 진정한 기술사로 빚어낸다.
노동부의 이번 시행령 개정안은 즉각 철회돼야 한다. 나아가 이 기회에 기술과 기능을 명확히 분리하고, 흩어진 기술 자격을 권한과 책임이 일치하는 '단일 면허' 체계로 재설계할 것을 강력히 제안한다.
시민의 생명은, 설익은 제도 개혁의 실험 대상이 될 수 없다.
출처 : 한국건설신문(http://www.conslov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