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양의 인질 왕자, 오늘의 건설산업에 묻다

<칼럼 : 백기현 대우건설 책임연구원 > 출처 : 한국건설신문 http://www.conslove.co.kr/news/articleView.html?idxno=89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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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연결하고 해석해 실천해야 비로소 그 진가 발휘
익숙한 현실에 안주하는 대신 변화에 눈 뜨는 자세 필요


1637년 1월, 삼전도의 눈밭에서 인조가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며칠 뒤 스물여섯의 세자가 심양으로 끌려갔다. 패전국의 인질이었다.

그런데 심양에서의 소현세자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비운의 인질과는 다르게 살았다. 청이 내준 땅에 농장을 열어 직접 경영했고, 거기서 나온 곡물을 팔아 자금을 만들었다. 

그 돈으로 끌려온 조선인 포로를 사서 풀어줬다. 조선과 청 사이의 껄끄러운 실무 협상도 그의 몫이었다. 인질 신분 8년, 그는 손익계산서를 손에 쥐고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약 400여년이 지난 지금, 건설산업도 낯선 땅에 서 있다. 심양으로 끌려간 것은 아니지만, 익숙했던 질서는 이미 무너지고 있다. 숙련 인력은 빠르게 이탈하고, 안전과 품질에 대한 요구 수준은 계속 올라간다.

공기는 짧아지고 원가는 치솟는데 현장의 불확실성은 오히려 커졌다. 여기에 인공지능(AI)이 설계, 시공, 안전, 품질, 공정, 원가관리의 규칙까지 다시 쓰기 시작했다. 건설산업에서 AI는 더 이상 선택지가 아니다. 생존 방식에 가깝다.


■ 현실을 냉정하게 읽었다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보여준 첫 번째 태도는 냉정한 현실 인식이었다. 그는 낯선 세계를 두려움이나 적개심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힘의 중심이 어디로 이동하는지, 무엇이 바뀌고 있는지, 조선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살폈다.

오늘의 건설산업에 가장 위험한 문장은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으로도 충분하다"이다. 과거에는 베테랑 한 사람의 경험과 직관이 수많은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그 베테랑이 현장을 떠나는 속도가, 다음 세대가 채워지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 개인의 기억에만 저장된 판단은 그 사람이 나가는 순간 회사에서 사라진다.

질문은 이것이다. 지난 10년간 우리 현장이 겪은 시행착오 중, 지금 검색해서 꺼내 볼 수 있는 것은 몇 퍼센트인가.


■ 학습의 속도가 곧 격차로 이어지다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새로운 문물과 지식을 접하며 달라진 세계를 이해하려 했다. 건설산업 역시 이제 콘크리트와 철근뿐 아니라 데이터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드론 영상, BIM, 디지털 트윈, 공정 기록, 장비 센서, 안전 감지 정보는 더 이상 부가 자료가 아니다. 현장의 상태를 읽고 미래의 위험을 예측하는 새로운 언어다.

같은 장비와 같은 인력을 갖고도 어떤 기업은 공정 지연을 미리 발견하고, 어떤 기업은 문제가 터진 뒤에야 대응한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데이터의 양이 아니라, 데이터를 연결하고 해석해 '행동'으로 옮기는 '속도'다.


■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는다


소현세자는 청의 힘을 인정했지만 청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지는 않았다. 조선에 과도한 부담을 주는 요구에는 맞섰고, 배울 가치가 있는 지식과 문물에는 문을 열었다.

베이징에서 서양 선교사 아담 샬과 교류하며 천문과 역법 서적, 과학 기구를 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배척하지도, 추종하지도 않았다.

현장에서 흔히 듣는 말이 있다. "그거 예전에 해봤는데, 아무도 안 쓰더라." 이 냉소는 게으름이 아니라 '학습의 결과'다. 현장의 문제가 아니라 발표 자료의 문제를 풀어주는 기술을 여러 번 겪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판단 기준은 단순해야 한다. 실제로 공기를 줄였는가. 재작업을 예방했는가. 품질 편차를 낮췄는가. 사고 가능성을 더 일찍 발견했는가.

영상 기반 위험구역 감지, 장비 간 충돌 예방, 구조물 변형 모니터링, 품질 이상 탐지, 자재 수요 예측과 공정 지연 조기경보처럼 현장의 손실을 직접 줄이는 곳부터 손대야 한다.

발표 화면에서만 움직이는 AI가 아니라, 안전모를 쓰고 현장에 들어가는 AI가 필요하다.


■ 두 세계를 잇는 통로가 되다


소현세자는 청의 왕족과 장수들을 가까이에서 접하며 그들의 언어와 판단 방식을 이해했다. 동시에 조선을 대표해 무리한 요구를 줄이고 양국 관계를 조정했다. 그는 인맥을 만든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질서 사이에서 현실적인 해법을 찾는 통로가 됐다.

건설 AI에 지금 가장 부족한 것이 이 통로다. 현장을 잘 아는 사람은 데이터를 모르고, 데이터를 다루는 사람은 현장의 맥락을 모른다.

기술 부서는 정교한 모델을 만들지만 현장은 왜 써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하고, 현장은 중요한 문제를 알고 있지만 그것을 데이터 문제로 번역하지 못한다. 이 간극을 그대로 둔 채 시스템만 도입하면 기술은 끝내 현장 밖에 머문다.

AI 전환의 핵심은 흩어진 데이터를 한곳에 모으는 데 있지 않다. 현장의 언어를 데이터의 언어로 바꾸고, AI가 내놓은 결과를 다시 작업자의 행동으로 되돌리는 구조를 만드는 데 있다.


■ 그리고, 우리가 잘 말하지 않는 결말


1645년 2월, 소현세자는 8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왔다. 서양의 천문 서적과 과학 기구를 함께 가져왔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두 달 뒤, 그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사인을 둘러싼 논란은 지금도 정리되지 않았다. 이후 세자빈 강씨는 사사됐고 어린 아들들은 제주로 유배됐다. 8년간 익힌 감각도, 가져온 지식도 조선의 제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흩어졌다.

소현세자는 배우는 데 실패한 것이 아니다. 배워 온 것을 받아들일 조직이 없었을 뿐이다. 건설산업의 AI 전환이 멈추는 지점도 대개 여기다.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다. 데이터가 없어서도 아니다. 새로운 방식을 배워 온 사람이 조직 안에서 "현장 물정 모르는 사람" 혹은 "기술만 아는 사람"으로 분류되는 순간, 그가 가져온 것은 조용히 사라진다.

그리고 몇 년 뒤 우리는 다시 말한다. "그거 예전에 해봤는데, 안 되더라."

이미 우리 회사에도 심양에서 돌아온 사람이 있다. 데이터로 현장을 다시 보기 시작한 젊은 엔지니어, 낯선 도구를 붙들고 씨름하는 관리자, 익숙한 방식을 의심하기 시작한 소장. 문제는 그들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질문은 "우리가 AI를 얼마나 도입했는가"가 아니다. 변화한 현실을 제대로 읽고 있는가. 필요한 기술을 현장에 맞게 고르고 있는가. 그리고 배워 온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AI 시대에 가장 큰 건설사가 반드시 이기는 것은 아니다. 가장 빨리 배우고, 가장 정확히 고르며, 배워 온 사람을 가장 잘 쓰는 기업이 살아남는다.